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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 국가대표 김태영 어머니 청각재활 후기

작성자 김태영 어머니 | 날짜 2010/12/22 | 첨부 -

1990년 2월 어느 날 한 병원에서 사내아이가 울지 않고 태어났다. 의사로부터 엉덩이를 한 대 철썩 맞고 나서야 울음보를 터트렸다. 그렇게 태어난 김태영은 태어날 때부터 쉽지 않은 삶을 시작하였다.



뽀오얀 피부의 너무나 귀여운 모습의 아이는 태어난 지 백일 무렵부터 밤낮이 바뀌어 엄마를 힘들게 하더니 9개월이 되어 갈 때 중이염을 겪게 되었고 돌이 지나도 일어서지 않아 대구 시내 모 종합병원에서 다리 관절 x-ray사진을 찍어보았지만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15개월이 지나 겨우 일어섰다. 23개월이 지나서는 여느 아이들처럼 옹알이가 없는 것을 이상하게 느껴 어느 소아과를 찾아갔더니 담당 의사 선생님이 전문병원을 찾아가 검사해 보라며 소견서를 써 주시는 것이었다. 동산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보니 난청으로 진단이 나왔다. 의사선생님의 말을 믿지 못해 인천 세브란스 병원, 길병원, 서울 삼성병원 등 재검사를 해보았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혀 온 세상이 캄캄해 지는 느낌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공허한 마음으로 검사 결과지와 아이를 업고 시댁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였다.



시댁 어른께 죄송한 마음에 어떻게 말씀 드렸는지도 모르겠다. 마치 커다란 죄라도 지은 것 같아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서울 모 보청기 상사에 가서 귀걸이형 보청기를 맞추어 끼고 난청교육 학교에 찾아갔더니 조기교육을 시키면 정상아이 못지 않게 성장할 수 있다는 학교장 선생님의 희망의 말씀(어느 가정에는 세 자녀가 난청인 가정도 있는데 태영이는 혼자니까 부모가 조기 교육에 매진하면 잘 될 것이라는 조언)은 희망을 끈을 놓지 않게 해주었다.



1993년 7월 대구로 내려오자마자 무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대구대 클리닉(서영란 원장님)에 교육 신청을 하고 특수 교육과 청련 교육을 받았고 또 병원에 가서 중이염 치료를 병행하는 등 힘들 날의 연속이었다. 다음 해에는 고막 안에 물이 차서 경대 병원에서 고막 내 물 제거 관 삽입 수술 및 재수술 등으로 어린 아이는 무척이나 힘들어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아이가 화면을 보는 게 아니라 화면 옆을 보는 것처럼 얼굴이 돌아가는 것이 이상하여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하니 사시라는 진단이 나와 양쪽 눈 수술하는 등 병원을 오가는 날이 많았다.



1994년 3월 경신 난청 센터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조금씩 말이 늘어갔지만 아이가 밖에서 늘 사고뭉치였다. 다른 아이들의 머리를 때려 피가 나게 하곤 해서 엄마의 손에는 항상 상처 아물게 하는 연고와 사과하는 과자 봉지가 들려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놀 때면 항상 친구들과 떨어져 놀아야 됐고 감시의 대상(?)이 되었지만 아이의 모습은 해맑아보였다.



1997년도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 할 때에는 갈등도 많이 했지만 일반 학교에 보내기로 했다. 그러면서 교육실의 언어치료도 병행해서 하다 보니 하루에 버스를 여섯 번을 타야하는 기나긴 여정이 시작되었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내 아이가 좀 더 나아진다면 이러한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이의 발전을 위해 미술, 피아노, 태권도 등을 시켰으며 크게 뒤떨어지지 않았으나 수업중에 왔다갔다하는 등 수업에 집중을 잘 하지 못하였다.



큰 문제없이 지내다 삼학년 때 결손아이와 함께 나쁜 행동을 해 너무 화가 나서 한참을 혼내다가 분을 참지 못해 아이를 데리고 어느 시골 외진 곳에 내려놓고는 이곳에서 혼자 살라며 저만치 떨어뜨려 놓았더니 목이 터져라 울면서 쫓아오는 아이를 다시 동네 파출소에 데려가 경찰 아저씨에게 부탁해 혼을 내 준 일이 있었는데 그 때 파랗게 질린 아이의 얼굴을 보고 눈물 흘린 사건은 두고 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그 이후로는 절대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다.

아이를 위해 엄마는 악발이가 되고 용기를 잃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 키우자고 힘들 때마다 나 자신과 약속을 했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게 마법을 걸며 살아왔다. 고생 끝에 낙이 있다고 지금은 고생하지만 언젠가는 행복이라는 휴식처에서 쉬고 있는 내 자신의 미래를 그려보며... 지난 날의 아픈 기억(보청기를 낀 아이 보고 요즘 엄마는 유별나다는 수근거림)은 잊혀지길 바라며......



산만하고 개구쟁이지만 산수를 잘 해 친구들로부터 박수도 받는다는 반 친구와 선생님의 칭찬도 내게는 희망이요 꿈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교육실에서 아이가 컴퓨터를 배울 때에는 학교에 가면 그 날 그날 공부할 과제를 컴퓨터로 찾는 과제를 숙제로 내어 주시던 선생님의 가르침도 집중력에 많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6학년 때 서영란 원장님의 추천으로 사격에 입문하게 되고 사격에 흥미를 느끼면서 집중력을 보이고 산만함이 점차 줄어들게 되니 자연적으로 아이의 성격도 바뀌어 남을 배려할 줄 아는 계기가 된 것 같다. 2005년 농아 올림픽에 갔다 온 뒤로부터 아이 스스로가 자기 자신의 진로를 결정하는 조금은 성숙한 모습을 보였고 그런 모습도 내게 보람이었다. 어렵고 힘들 때에도 항상 할 수 있다며 용기를 복돋아줄 때, 또 잘 했을 때 최고라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넌 할 수 있어”, “넌 최고야”라며 격려하고 칭찬하던 시간들..



모두가 그렇 듯 항상 좋은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영이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다.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실력이 안 나오고 성적이 떨어지자 고민과 갈등을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항상 할 수 있다는 격려의 손짓으로 엄지 손가락을 세워주자 오래지 않아 슬러프를 극복하고 다시 제 실력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들은 항시 칭찬을 해주었을 때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제는 더 이상 두려울 게 없다. 2008년에는 체육훈장, 대한민국 인재상을 수상하고 난 뒤로는 많이 의젓하고 어른스러워진 태영이가 이제는 이 사회의 한 일원으로 어떠한 두려움도 스스로 헤쳐 나가는 아들이 되길 바란다.



대학생으로, 직장인으로서 최고가 되어 엄지 손가락을 치켜드는 그 날까지.....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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